도시와 빛

허접한 것이지만 사진을 정리하다 뿌옇게 만나는 도심의 달빛을 담아 둔 사진 몇 장이 나를 유년의 세상으로 끌고 간다. 사실이지 나는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은 별로 없지만 단 하나의 밤길은 생생하다. 내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 쯤 어느 날 어머니 손을 잡고 나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로 난 시골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손엔 내가 이기기 힘든 무게의 술병 하나를 들고 말이다. 무엇 때문에 갔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달빛에 묻어나는 유난히도 하얀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던 그 밤 나는 어머니 종종걸음을 열심히 따라 걸었다. 달빛은 고요를 넘어 적막을 부르고 시리게 푸르른 하늘엔 별빛이 내 작은 총총걸음 수만큼 빛나고 있었다. 그 때 멀리 민가의 불빛 하나 가물거리며 눈에 들어오자 나는 갑자기 힘이 솟아났다, 아! 다 온 것이리라..... 지금 가보면 무지 짧은 길이기도 하고 커다란 공장이 우뚝 서 있지만 실로 그 때 어린 나에겐 그 길은 멀고멀었다. 할아버지 집에 가던 그 밤길은 나에게 있어 어머니와 걸었던 단 하나 남은 유년의 밤길이다. 지금 그 길을 생각하니 그 밤하늘의 빛이 눈에 선하다. 달빛 별빛 너머 인적 없는 고요한 길 그 길을 말없이 내달리던 어머니 그런 나의 길을 말없이 동무 되어주던 그 포근한 빛들을 생각하면 삶이 불러오는 감흥이 저절로 일어난다. 도심에서 달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 휘황한 빛 사이로 만나는 도심의 달빛, 별빛은 쉴틈없이 상처 난 마음을 몰아세우기도 들뜨게도 한다. 그 아주 오래전 그날 세상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 밤길 창호지를 걸러 나오는 고즈넉한 빛 그 창호지는 달빛 까지도 담아와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정신을 나에게 주고 갔다. 어느 날인가, 아무런 빛도 없는 도심에서 둥글고 너그런 처마 끝에 걸린 초승달을 만날 수 있거나 북으로 난 작은 창으로 별빛을 헤아릴 수 있다면 삶에 스며드는 내 정신은 늘어나는 내 몸집처럼 더욱 더 풍성할 것이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