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 - 장갈재

사진 / 장갈재 서낭당  

여행을 하다보면 어떤 자기 기만 현상을 겪게 된다. 다름 아닌 풍경을 보는 눈이다. 어떤 풍경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눈의 자기 기만 현상이다. 여행의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다.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느끼는 것이 있고 여행지의 삶과 역사를 품어 느끼는 것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오늘 걷는 장갈재는 후자에 속하는 곳이다. 지금 나는 자기 기만의 길을 걷고 있다. 어떤이는 이런 길을 왜 걷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사실 밋밋한 이 시골길을 따라 걷는 여름길은 사실 짜증을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넘겨다 보면 그 속에 내가 있고 이웃이 있다. 장갈재는 안동과 영양의 옛사람들의 중요한 소통로였다. 장갈재는 지금도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길이지만 농촌의 인구 감소로 폐가가 늘어 가는 만큼 길도 묻혀 가는 곳이다. 이 길을 걷다보면 경작지의 80%이상이 고추밭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담배밭과 콩밭과 배추밭이 간간히 눈에 띄지만 고추 농사가 압도적이다. 지역의 특산물로 경제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현재의 우리 농촌 구조를 실감나게 확인할 수있는 길이다. 어떤 특정 작물로 이루어진 농촌은 그 작물의 작황에 의해 그 지역 경제를 송두리째 흔든다. 이런 농업 구조는 그렇지 않아도 피폐한 농촌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한다. 그렇다고 다양한 대체 작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다양한 작물 재배 구조를 가지고 적절한 판로를 구축하는 농업이 내 좁은 소견으론 더욱 안정적이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길은 돌고 돌아 가고 그 모퉁이들을 돌 때 마다 폐가를 만난다. 어수선한 마음이 더위만 불러오지만 돌고 도는 3시간 길은 어느새 재 정상이다. 장갈재 정상에 서면 서낭당이 하나 서 있다. 아주 작은 당집으로 된 장갈재 서낭당은 참으로 정겹다. 우리나라에는 촌가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끼고 있는 앞산 고개나 마을의 입구에는 서낭당이 있다. 옛사람들은 산이나 개울을 단순한 자연으로 생각지 않고 생명이 있는 힘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은 자연 특히 땅의 정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자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자연을 숭배하는 사상을 가졌다. 대표적인 것이 마을에는 당산이라 하여 마을을 보살펴 주는 신을 모시는데 마을에 따라 국수당, 산신당, 서낭당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장승을 세워 놓기도 했다. 서낭당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질병, 액운, 재앙등을 인력으로 막아낼 수 없을 때 마을 입구나 산기슭 등의 허한 지점에 설치하고 서낭신을 봉안하여 신앙함으로써 마을을 수호하였다. 또한 마을을 들고 나는 걷는 사람들의 무사 귀환을 소망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서낭당이 무속적 기능을 지닌 곳으로 여겨 근대화 이후 대부분 사라져 이제는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서낭당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속이라기 보다는 부족 국가시대에 석전(石戰)으로 부락을 방어하던 무기의 저장소였고 일종의 병참(兵站)기지였다는 학설을 따라가면 이렇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시는 집이다. 서낭신의 원말은 성황신이다. 서낭의 사전적 의미는 성황(城隍)이 음운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서낭=성황(城隍)이라 함은 성을 쌓고 해자를 파서 마을을 지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서낭은 본시 부락방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신라 자비왕 2년의 기록에는 왜구의 침략에 돌멩이 부대를 조직해 적을 격퇴했고 고구려 보장왕 4년에도 당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돌멩이 부대가 있다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석투군(石投軍)이라는 군사조직이 있었으며 조선에는 성황도감(城隍都監)이라는 부대를 두어 정기적인 돌던지기 훈련을 실시했다. 남한에서 서낭(성황)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은 남한산성의 동북쪽인 마천동(돌무데기마을이 있다)과 거여동 일대 그리고 거제도, 장승포 일대의 옥포만 해안이다. 남한산성에 서낭이 많은 것은 병자호란 때문이고 장승포에 요새처럼 서낭이 늘어서 있는 것은 이 곳에 왜구의 피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낭의 전투적 성격이 잘 보전되어 있는 곳은 행주산성이며 행주산성 동남쪽 한강의 북쪽이 되는 덕양산의 남동쪽에는 돌싸움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행주산성에서 아낙네들이 행주치마에 돌멩이를 싸서 날랐다는 것은 단순한 민담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행주산성 일대의 한강 바닥에는 사구(砂丘)가 형성되어 한강 하류 중에서 깊이가 가장 얕아 도강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그리하여 이 일대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여겨 산성을 쌓았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이나 한국전쟁 당시의 북한군도 이 곳을 도강(渡江) 지점으로 삼은 바 있다. 서낭(성황)의 군사적 기능은 화약과 총포의 발명과 함께 사라지고 민속놀이로 흔적이 남아 있는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정월 대보름날의 행사로 볼 수 있었던 돌싸움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돌싸움 행사는 만리동(萬里洞)고개의 것이였고 1900년대 초엽의 선교사 기록에 따르면 구경꾼이 3만~4만명이었고 싸움꾼만 9000명이었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지는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싸움은 더욱 치열했으며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이 흔히 생겻으며 심지어 부자(父子)가 편이 갈려 싸워도 양보하는 일이 없었다고 할 정도이다. 그리고 서낭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그 위치를 주목해야 하는데 서낭은 반드시 마을로 들어가면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제신(祭神)이나 제천(祭天)이나 제산(祭山)을 위한 것이었다면 한적하고 높은 곳에 위치할 일이지 사람이 번잡하게 왕래하는 위치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고 제단의 의미였다면 돌멩이의 크기가 더 클 수도 있는데 던지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처음의 서낭의 기능은 무기 저장고였고 서낭이 무속화 과정을 겪게 된 것은 그 신성성(神聖性)때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전쟁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승전에 대한 소망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출전에 앞서 전쟁에서 승리를 바라는 전승기원(戰勝祈願)의식을 거행하는데 이 때부터 서낭이 무속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 서낭이 있는 곳을 지키면 승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역처럼 생각하고 신성(神聖)개념이 부여됐다. 서낭이 무속화된 이후 서낭 앞을 지날 때면 지켜야 할 의식을 갖게 되었는데 머리를 숙여 절을 하는데 성소(聖所)에 대한 공경의 의미를 가져고 떡과 같은 음식을 바치는 것은 물신(物神)에 대한 향응의 뜻을 가진 것이며 침을 뱉는 것은 그 곳에 모여 있을지도 모를 잡신을 떨쳐버리기 위함이다. 그밖에 색동 헝겊이나 왼쪽으로 꼰 새끼줄을 걸어 놓는 것은 단장이나 장식의 의미가 있고 까치발을 세 번 뛰거나 짚신을 갖다 놓는 것은 여행의 안전을 비는 것이다. 돈을 놓는 것은 죽은 자와 저승사자를 위한 여비의 의미가 있고 헌 옷을 걸어 놓는 것은 지금 병 중에 있는 자의 쾌유를 비는 소망이며 황토를 뿌리는 것은 죽은 자의 황천을 비는 마음의 표시이다. 임신한 여인이나 생리 중인 여인은 그 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금기의 풍속이 있었고 성소이므로 그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전쟁과 평화를 애기하는 장갈재는 우리의 비극 6.25의 격전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애기를 곱씹다보면 역사는 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원시와 문명의 차이는 멀리 있는게 아니라 바로 곁에 있다. 원시는 문명 속에 숨쉬고 있고 문명은 원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죄 많은 것은 문명이다. 문명이 죄가 많은 것은 소유만을 가르쳐 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시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정말이지 너무 많이 가졌다. 길은 어느새 영양땅으로 내려서 있다. 

*이 장갈재는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동촌리에서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로 넘어가는 옛길이다. 어느 쪽에서 접근하든 길 잃을 염려는 없으며 큰수레길이 끝까지 펼쳐진 곳이다. 단 안동쪽에서 올 경우 전주가 서 있는 곳 갈림길에서 전주를 따라가지 말고 전봇대가 없는 곳 즉 왼쪽 길로 올라서야 한다, 전전봇대를 따라가면 폐가만 있고 마을도 길도 없다. 안동쪽 동촌리 까지, 영양쪽은 토곡2리(앞실) 까지 포장이 되어 있고 버스도 들어 온다. 안동쪽 동촌리-장갈재 정상-영양쪽 토곡2리 앞실 까지가 비포장 옛길이다. 비포장 옛길은 약 8km 이고 포장된 곳 까지 합하면 약16km 가량으로 5시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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