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새벽 문수골
바람은 산천을 즐겁게 하고 햇볕은 초목을 살찌게 하는 봄날 나는 왼쪽의 핏빛 역사 지리산 질매재을 향해 걷는다. 세상은 잠들어 있고 안개만 내려 앉는 문수골 계곡을 터벅이듯... 내 여행길에서 유난히도 친근한 안개 안개 친구는 앞선 세상을 천천히 지우며 내게 소리없이 다가와 등을 다독거리며 시끄런 걸음으로 세상에 쫓겨 사는 나를 허리 붙들어 세우고 거친 호흡을 달래준다. 그는 또한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끝없는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비켜 세운다. 그런 그의 세상을 나란히 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여행이다. 안개는 세상의 높고 낮음에 마음을 두지 않고 똑 같은 질량과 무게로 사랑을 베푼다. 더불어 그는 누가 자신의 세상을 헤집고 지나쳤다고해서 불쾌해하지도 더럽혀지지도 스러지지도 않는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세상을 기웃거리면 잠시 한걸음 물러나 바라 보아주고 자취가 사라지면 조용히 제자리를 찾는다. 그의 세상에는 단조로운 풍경으로 그득하지만 그 잿빛 색감이 불러오는 미묘함은 눈부신 화려함으로 눈을 어지럽히는 세상과는 다른 촉촉한 눈길로 세상에 다가서게 다스려 준다. 문수골 입구 오미리를 출발한 안개와 함께하는 길 상죽 마을,중대마을,영암촌,불당,그리고 문수사 갈림길 까지 2시간을 세상과 안개와 나를 뒤섞어 걸어 왔다. 문수골하면 계단식 산다랭이 논과 밭을 떠올린다. 무참히도 세상에 휘둘려가는 이곳을 넘겨보며 오다가 산아래 보이는 계단식 논 두어마지기가 그나마 위안을 준다. 꼭 옛것을 그대로 두자는 것은 절대아니다... 세상에서 먹고 살자면 변해야 한다. 하지만 농사로 먹고살지 못하고 어차피 볼거리에 휘둘릴바에야그대로나 놔두고 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이다.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언젠가는 잊혀져 갈 그 뻔함 옛모습을 팔아 먹고 살려거든 제발 그대로 둘지어다. 10여km를 걸었나 보다 이제 밤골 입구 지리산 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질매재 오르는 길로 접어든다. 지금 까지와 또 다른 맛으로 다가서는 아름다운 계곡과 숲을 보니 이제 진정 지리산으로 들어선 기분이다. 산은 사람을 끌어 들인다. 그래서 삶을 새롭게 하려는 사람들은 산으로 찾아든다. 그런 점에서 지리산은 사람과 가까운 산이다. 사람과 산을 생각할 때면 자연의 일부인 산으로서의 지리산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장엄하며 서사적인 명상의 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과의 숱한 소용돌이 속에 위치해 있으며 그 사람들의 고난과 한을 품고 호흡을 같이 해온 지리산은 더 이상 아름다움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순수한 산도 아니다. 그것은 지리산이 사람과 너무 가까운 탓이다. 그 이유는 빙둘러 사람들이 등붙이고 사는 산은 지리산 외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산도 사람과 만나면 아픔이 크다. 지리산은 겉으로 보기와는 딴판이다. 멀리보면 산이 유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산을 오르면 바위로 이루어진 험한 산이다. 사람들이 겉만 보고 지리산을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뭐 차타고 성삼재로 올라 노고단 거쳐 천왕봉 간다면 쉬울 수 있을 것이다. 지리산의 숱한 계곡중 문수골 질매재 계곡은 특히나 험하다 그렇기에 빨치산이라 불리는 현대사의 화두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이다. 빨치산이란 말은 비정규유격대라는 러시아어 partizan에서 파생된 말이다. 빨치산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피아골을 떠올린다. 하지만 지리산 남부 일대는 빨치산과의 관계를 떼어 낼 수가 없다. 나는 사상적 조류를 담아 보러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사상이란 신앙을 버리고 사람으로 더듬어 보고 싶을 뿐이다. 보이지 않게 오고 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스치며 내 온몸에 퍼지는 그들의 호흡과 시선을 물에 담는다. 그 물이 돌고 돌아 이 산을 빠져나가기 전에 내 몸에서 나는 그들의 숨결을 듣고 싶다. 나는 흔들리며 걷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바람에 귀를 기울인다. 봄이 오는 지리산 사람들의 죄 씻어주기 위하여 일제히 눈뜨고 팔 벌리는 고로쇠나무 몸에 박힌 검은 줄 그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가 되어 그들의 몸통 오른쪽과 왼쪽에 비수를 꽂고 피 흘린다. 시대의 아픈 점액질은 밤마다 산을 물어뜯고 이제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서일까 점점 메마름으로 속이 쓰린 나무들의 수액들은 지금 흐르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지리산 깊은 계곡으로... 사람들은 언제 부터 나무의 피를 먹고 살았을까 고로쇠나무에 박힌 하얀 링겔줄 그 줄을 통해 사람들은 나무의 피를 지금 수혈 받고 있다. 시뻘겋게 잘려진 세상 허리마다 깊어가는 죄만큼 슬픔만큼 마음에 붕대를 감고 서서 기다리는 지리산 고로쇠나무에서 나는 산안개로 내려서는 투박한 그들의 어깨를 본다. 사람의 눈물이 흐른다 그 흐르는 눈물 밟으며 밤새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시대의 화두를 안고 살다간 사진 몇장으로 기억뿐인 잊혀지지 않는 표정들을... 나는 발걸음을 밀려서걷고 있다.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바위돌 투성이로 거칠어진 사람들 나를 끌고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이 보인다. 잠시 허리 굽혀 신발끈 고쳐 매며 흙을 보니 더는 고쳐 맬 수 없는 사람들의 슬프고 서러운 생애가 엎드려 있다. 더이상 오르기가 싫다,아니 발이 천근 무게로 자꾸만 내려 앉는다. 질매재를 오르기 2시간 질등을 타고 올라서니 노고단이 멀리 보인다. 노고단은 자연휴식년제로 미리 신고된 탐방객만 오를 수 있다. 황사가 모진 바람을 타고 흐르는 지리산 자락이 멀리 흐르고 있다. 넓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에게 더 따뜻해져야겠다. 멀리 낮달이 데리고 온 하얀 세상이 나를 두드린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자유를 그리다 어머니 깊은 품속 같은 지리산에 몸을 누인 사람들 그들이 남긴 허와 실을 지금 이시대에서 헤아려 본들 무슨 소용일까 역사속 사람들은 언제나 승자만이 기억될 뿐이다. 바람 속으로 사라진 산처럼 부유하고 계곡처럼 넉넉한 내가 아는 세상밖 사람들에게 봄꽃으로 편지를 쓴다. 죽음을 딛고 오는 고혹한 봄빛 고운 지리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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