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이면...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만나는 사람이 있다. 그를 만나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이 세상에서 나처럼 그를 아는이도 없을 터이지만 그처럼 나를 아는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그는 무척이나 다르다. 이유는 간단 명료하다. 나는 마흔하고도 여덟이지만 그는 열하고 일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주 만나는 이유는 상처로 얼룩진 그가 살아온 날들을 축척해 놓은 내 기억속에 열일곱 그가 미처 예감하지 못했던 편견과 고정관념과 삶의 이데올로기가 내게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 삶의 상처는 필연적으로 금기를 만든다. 금기는 시간으로 하여금 체계화하여 금기의 무게를 살아온 날들과 정비례시킨다. 그와 나는 금기의 총량과 질량만 다를 뿐 그 금기의 체계화된 이데올로기는 늘 길을 같이 한다. 그런 점에서 나의 삶은 상처투성이 그의 삶의 가면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점에서 그와 나는 다르다. 사물을 보는 시선의 사실성이다. 나는 그보다 사물을 보는 눈이 훨씬더 사실적이다. 그가 안다고 하는 것들은 직관의 이미지들이다. 그는 일년이 넘도록 같은반 친구들의 이름을 절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가진 이미지들은 늘 어둠과 광합성을 하고 내성적 자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교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사교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거나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의지론적인 면에서 때론 사교성이 강하고 활달하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내가 그보다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상처와 금기와 사교적인 관념들을 껴안고 아우르기 위해 비가 내리는 날이면 허심탄회하게 만나는 것이다. 비내리는 날이면 내가 그와 만나 껴안는 것들은 열일곱 그를 살리는 방법이고 동시에 세상에 갇힌 나를 탈출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